MY MENU

자료공유

제목

영화 파이란을 본 후

작성자
최영진
작성일
2003.04.30
첨부파일0
조회수
756
내용
일전에 비디오로 보았던 송해성 감독의 영화 파이란에 대한 짧은 생각을 올려봄니다.
영화 파이란은 기본적으로 여러가지 진부하고 엉성한 요소들로 짜맞추어진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마치 강재(최민식)라는 인물의 '양아치적' 성격을 형상화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형들처럼 보인다. 보스로 등장하는 용식(손병호)이 나이트클럽 직원들을 모아놓고 주먹을 휘둘러대는 장면, 그의 부하들이 구멍가게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는 장면, 파이란이 찾아간 직업소개소의 풍경, 또다른 용식의 부하 하나가 비디오가게를 차지하는 장면, 강재와 술을 마시던 용식이 갑자기 뛰쳐나가 뒷골목에서 다른 동네 양아치 하나를 죽이는 장면 등등은 강재가 얽혀들어가는 두가지 사건(살인사건과 위장결혼사건)을 끌어들이기위한 수단 이외의 어떤 다른 특징도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강재의 룸메이트로 등장하는 경수(공형진)도 극중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코믹 릴리프 정도의 역할로 그친다. 이렇듯 전반부에서 밋밋하고 진부하고 다소간 억지스러운 플롯의 전개과정은 강재가 군산(?)으로 내려가는 기차속에서 읽게되는 한통의 편지로부터 서서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강재씨… 고맙습니다.
강재씨 덕분에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 모두 친절합니다.
그치만 가장 친절한 건 당신입니다.
왜냐하면 나와 결혼해 주셨 으니까요
최민식의 표정연기가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부터이다. 한장의 증명사진과 더불어 어떤 수식어도 가미되지않은 한통의 짧은 편지를 통하여 강재는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것같은 지극히 순수한 어떤 대상과 부딪치게 된다. "가장 친절한 건 당신"이라는 문구를 계속 생각하고 되씹어보는 강재의 얼굴은 낯설음과 묘한 흥분, 그리고 까닭없는 두려움으로 뒤섞인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는 이제 강재의 플롯과 파이란의 플롯이 마치 철로에 놓인 두개의 평행한 레일처럼 나란히 달리고 있는 이유를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아도 최민식의 연기는 눈부시다. 기차속에서 파이란의 사진과 편지를 읽는 순간에서부터 파이란의 시신을 화장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강재는 파이란과의 관계에서 무엇하나 자신의 의지와 바램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늪속으로 빠져들면서 몸부림친다. 파출소 장면에서 강재가 아내의 죽음에 대한 남편의 변을 순경에게 주절거릴때, 카메라는 강재를 측면에서 잡아들어간다. 이미 절반이상 강재는 파이란의 남편이 되어버린 순간이다. 시신인도 절차가 끝났다는 순경의 말에 강재가 심한 모멸감과 분노를 느끼는 것도 바로 그가 파이란의 남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안실에서 경수가 강재의 오버액션을 다둑거리려는 장면에서 사나운 시선으로 경수를 돌아보는 강재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보시라. 경수와 마주한 밤 술자리에서 만취한채 "산송장으로 나타나서 날보고 어떡하라고"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강재. 지금껏 어떤 한국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내면연기의 백미를 보는 순간이었다. 죽음이라는 경계로 인하여 대상에 대한 어떤 행위도 불가능한 상황. 출구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속에 갇혀버린 상황.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강재는 자신의 내면으로만 파고든다. 그의 표정, 몸짓, 말 모두가 표면아래로 가라앉은 복잡한 생각의 갈래들을 표현한다.
최민식의 연기가 이 영화를 살린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는 송해성 감독이 집요하게 물고늘어진 플롯의 평행구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파이란과 강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행하다. 그 마주한 평행선의 거리는 영화의 전반부에서 파이란이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강재의 사진과 파이란의 눈 사이의 거리로 표현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강재의 눈과 파이란의 증명사진 사이의 거리가 앞서의 거리와 중첩된다. (강재가 영안실에서 파이란의 사진을 제자리에 정돈하고 향을 피우고 바닥에 걸터앉아 힐끔힐끔 그 사진을 쳐다보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라) 파이란과 강재 모두의 경우, 서로에게 놓인 거리는 항상 사진이라는 "가상적인 창" (virtual window)을 매개로 한다. 사진이란, 존재의 흔적과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가상적이다. 강재와 파이란은 서로에게 이 가상적인 흔적으로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두사람은 한번도 서로 만난적이 없기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속에 놓인 두 평행한 플롯은 실제적인 현재시점(강재의 시점)과 가상적인 현재시점(파이란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이점이 바로 플래쉬백을 써서 과거와 현재를 가지런하게 정리된 하나의 직선으로 표현하는 여타의 영화들과 이 영화의 차이점이다. 물론 이 영화도 다시 헤쳐모여시키면 하나의 선으로 짜맞출수 있겠지만, 그것은 마치 기차의 트랙을 모노레일로 뜯어고치는 것과 비슷한 이상한 느낌을 줄 것이다. 이러한 실제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사이에 놓인 관계에 대한 감독의 독특한 성찰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최민식의 눈부신 연기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한편의 진부한 멜로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최영진.

게시물수정

게시물 수정을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댓글삭제게시물삭제

게시물 삭제를 위해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